후한의 환관 채륜(蔡倫)이 당시 중국에 있던 제지 기술을 개량하고 체계화해서 제작법을 표준화한 종이인 채후지(蔡侯紙)를 만들기 전에도 인류는 다양한 재료를 사용해서 기록을 남겼습니다. 종이 이전의 기록매체인 파피루스(Papyrus)와 죽간(竹簡), 목간(木簡), 양피지(羊皮紙)에 관하여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1. 갈대로 만드는 파피루스
종이를 뜻하는 영단어 ‘Paper’의 어원이 ‘Papyrus’로 알려져 있을 만큼 파피루스는 점토판과 함께 고대 서양 세계의 대표적인 기록매체입니다. 파피루스는 이집트 나일강의 비옥한 삼각주에서 많이 자라는 갈대의 일종으로 이름이 같은 파피루스(학명은 cyper papyrus)로 만들었습니다. 파피루스가 처음 제작된 시기는 기원전 3000년경으로 추정되며, 파피루스를 제작 과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① 먼저 파피루스의 겉껍질을 벗겨내고 부드러운 속 부분을 얇고 가늘게 찢습니다.
② 찢어놓은 속 부분에 아교를 바르고 가로 세로로 겹쳐서 늘어놓습니다.
③ 겹쳐진 파피루스 속살을 방망이로 두들기고 무거운 돌로 눌러서 수분을 제거하고 서로 들러붙도록 합니다.
④ 그대로 건조하면 파피루스가 만들어지며, 가로 세로로 겹쳐서 붙이기 때문에 삼베 같은 무늬가 나옵니다.
⑤ 이렇게 제작된 사각형의 파피루스를 보통 20장가량 이어서 두루마리로 만들어서 사용했습니다.
파피루스는 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고 양피지보다 싼 데다가 점토판보다 가벼워서 문서를 대량으로 작성하기에 좋습니다. 내구성은 점토판이나 양피지보다 떨어지지만, 꽤 오랜 세월 동안 삭지 않고 화학물질에도 강해서 오늘날까지도 수많은 고대 이집트 문헌들이 전해집니다. 현존하는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문서는 대부분 종교 문서로 죽은 사람의 관 속에 미라와 함께 넣어두는 <사자의 서(Bolk ofie Deady>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 밖에도 파피루스는 공문과 회계, 의학, 설계 등 매우 다양한 분야에서 기록매체로 사용되었습니다.
파피루스는 고대 이집트의 주요 수출품으로 각광받았고, 이집트가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된 후에도 생산과 사용이 계속 이루어졌습니다. 이슬람 세력이 이집트를 점령한 다음에도 이탈리아와 남프랑스 같은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는 이슬람과 교류를 지속하며 여전히 파피루스를 애용했죠. 유럽에 제지법이 전해지고 몇 백 년이 지난 르네상스 시기에도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파피루스에 기록한 저작물을 남겼을 만큼 파피루스 사용은 오래 이어졌습니다.
751년 당나라와 아랍 세력이 격돌한 탈라스 전투에서 이슬람은 제지업자 출신의 당나라 포로에게서 제지법을 얻게 됩니다. 이슬람이 획득한 제지법은 점차 주변 지역으로 퍼졌고, 상대적으로 파피루스의 생산량은 줄어들게 됩니다. 마침내 12세기가 되면 파피루스의 전면적인 생산은 멈추게 됩니다.
2. 대나무를 엮어서 만드는 죽간, 나무를 잘라서 만드는 목간
죽간은 대나무를 길쭉하게 자르고 가공해서 글씨를 쓸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책(册)이란 한자는 죽간을 옆으로 묶은 모습을 본뜬 것이죠. 대나무가 아닌 나무 조각으로 만든 것은 목간, 목독(木牘)이라고 불렀습니다.
대나무를 쪼개서 바로 사용하면 습기 때문에 상할 수 있고, 대나무의 푸른빛 때문에 글씨를 써도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쪼갠 대나무 조각을 불에 쬐어서 진액을 빼내고 푸른빛을 없앤 다음 말려야 합니다. 말린 대나무를 두께 2~3mm, 폭 0.5~1cm 정도로 잘라내고 필요에 따라 길이를 맞춘 다음 글을 썼습니다.
책으로 엮을 땐 적게는 10~30개, 많게는 40~50개의 죽간을 무두질한 가죽이나 삼으로 만든 끈으로 위아래를 묶어서 두루마리 형태로 만들었습니다. 길이가 길면 묶는 곳을 중간에 한두 군데 추가했죠. 목간도 제작 방법은 비슷하지만 탄성이 죽간보다 떨어져서 길이를 더 짧게 했습니다.
목간은 목탄이나 주사(朱砂)로 된 먹으로 기록했지만, 죽간은 특성상 목탄이나 주사가 묻지 않아서 옻을 정제한 칠액으로 글자를 적었습니다. 특유의 점성 때문에 칠액으로 쓰면 글자의 획이 처음엔 두껍고 이후로는 급격히 가늘어집니다. 그 모양이 올챙이 같아서 칠액으로 쓴 문자는 과두문자(蝌蚪文字. 올챙이글자)라고 부릅니다.
죽간을 처음 만든 시기는 기원전 13세기인 상나라 시대로 추정됩니다. 이 시기에 이미 문자가 발명되어서 점을 친 과정과 결과를 적은 갑골문이 많이 출토되고, 상서(商書) 다사(多士) 편에 “은나라 선조에게만 책(册)과 전(典)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오는 걸 생각하면 죽간과 목간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둘 다 썩어서 없어지기 쉬운 유기물이라서 죽간이나 목간으로 된 당시의 기록물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습니다.
죽간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시기는 춘추시대이며 전성기는 기원전 5세기의 전국시대부터 2세기인 후한대까지입니다. 현재까지 중국에서 발굴된 죽간과 목간 문서는 대부분 이때의 것입니다. 채륜이 105년에 채후지를 만들었지만, 중국 전역으로 보급되기까진 긴 세월이 필요했고, 죽간과 목간은 4세기인 위진 남북조 시기까지 사용되었습니다. 마침내 종이가 죽간과 목간을 완전히 대체한 시기는 6세기 경입니다. 종이가 널리 쓰이게 된 후에도 내구성이 튼튼한 죽간과 목간은 일부 용도로 계속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멀리 물건을 보낼 때 관련 정보를 기록하는 꼬리표로 많이 사용되었죠.
죽간은 재료를 구하기 쉽고 만들기도 어렵지 않으며 내구성도 좋았지만, 무겁고 부피가 큰 것이 흠입니다. 두보의 시에 나온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 五車書(남자는 모름지기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한다)”는 구절은 이러한 죽간의 특성을 보여줍니다. ‘다섯 수레의 책’이란 말은 <장자(莊子)> 제33편인 천하(天下)에 있는 “혜시의 학설은 다방면에 걸쳐 있어 그 저서가 다섯 수레에 쌓을 정도이다.(惠施多方其書五車)”라는 글귀에서 나온 것으로 친구인 혜시의 박식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죽간과 목간으로 된 책은 오늘날의 책과 비교해 볼 때 같은 정보량을 담고 있어도 수레를 동원해서 옮겨야 할 정도로 부피와 무게가 많이 나가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쓰였을 것입니다.
3. 가축의 가죽으로 만드는 양피지
양피지는 양가죽으로 만든 기록매체입니다. 양피지를 영어로 parchment, 독일어로 Pergament라고 부르는데, 둘 다 양피지가 특산물이었던 고대 도시 페르가몬(Pergamon)에서 유래한 명칭입니다. 페르가몬이 양피지가 특산물인 도시가 된 것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의 왕이 페르가몬의 도서관이 알렉산드리아의 대도서관보다 더욱 발전할 것을 우려하여 파피루스 수출을 금지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파피루스를 구할 수 없자 페르가몬에선 대신 양피지를 개발했다는 것으로 1세기의 로마 정치가이자 학자인 대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도 <박물지(Naturalis historia)>에서 양피지는 기원전 150년경에 페르가몬에서 발명되었다고 적어놓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여러 지역에서 양피지를 사용했으므로 페르가몬에서 생산한 양피지가 품질이 좋았거나 더 개량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양피지는 염소와 소의 가죽으로도 만들며, 특히 생후 6주 이내의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것은 독피지((犢皮紙: vellum)라고 부릅니다. 양피지를 제작하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양이나 염소, 소가죽을 조심스럽게 씻은 다음 깨끗한 물에 24시간가량 담가둡니다.
② 라임과 물을 혼합한 액체에 다시 8일~16일 동안 담가서 가죽에 붙은 털이 잘 빠지도록 합니다. 이 기간 동안 나무로 된 노나 막대기로 하루에도 여러 차례 저어줍니다.
③ 액체에서 미끈한 상태의 가죽을 꺼내서 각진 막대나 통나무에 털이 있는 쪽을 밖으로 해서 걸쳐 놓고,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둥근 칼을 아래쪽으로 문지르면서 털을 깎습니다. 이 면은 ‘양피지의 털이 있는 면’으로 불립니다. 털을 다 깎으면 가죽을 반대로 돌려서 남은 살점을 제거합니다. 작업이 끝나면 가죽을 이틀 동안 맑은 물에 담가서 가죽에 남은 라임 성분을 제거합니다.
④ 끈을 달아서 조절 가능한 못으로 나무틀에 맞춘 다음 못을 감아서 가죽이 팽팽해지도록 합니다. 가죽이 찢어지면 마르면서 구멍이 커지므로 이를 막기 위해 가죽의 사방 끝을 조약돌로 감싸서 틀에 고정시킵니다.
⑤ 가죽의 젖은 상태를 유지하면서 루넬럼(lunellurm)이라는 굴곡이 큰 날이 달린 칼로 가죽의 양면을 면도해 줍니다. 그런 후에 팽팽해진 가죽이 틀에서 마르도록 놓아둡니다.
⑥ 바짝 마른 가죽을 한 번 더 면도하고 원하는 두께로 얇게 다듬어줍니다. 털이 있는 면의 자연적인 광택은 글쓰기에 좋지 않아서 이를 제거하는 면도 과정이 꼭 필요합니다.
⑦ 양피지를 틀에서 떼어내 보관합니다. 사용할 때에는 양피지 표면을 거친 화산석인 부석(pumice)으로 문질러서 약간 까슬까슬하게 하고, 아라비아검(gum arabic)처럼 접착성이 있는 가루를 조금 발라서 표면에 잉크가 잘 붙도록 해야 합니다. 잉크는 철분 용액과 탄닌 용액으로 분리된 산성 잉크를 사용 직전에 섞어서 씁니다. 이 잉크는 탄닌 때문에 일단 굳으면 물에 다시 녹지 않고 산성이라 양피지 표면을 미세하게 부식시켜서 글자가 양피지에 완전히 새겨지도록 해줍니다.
양피지는 파피루스보다 장점이 많습니다. 내구성과 보존성이 뛰어나고, 글을 쓰다가 잘못되면 칼로 살살 긁어서 지울 수 있어 수정도 쉽습니다. 파피루스는 섬유의 특성상 양면을 모두 쓰기 어렵지만, 양피지는 양면을 모두 사용할 수 있습니다. 파피루스 문서는 두루마리 형태로 만들어야 하지만 양피지 문서는 실로 묶어서 오늘날과 같은 책 형태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양피지의 최대 단점은 가격입니다. 현대의 양피지도 A4 크기의 가격이 장당 15,000원 정도나 하지만 중세 시대에는 더 비싸서 장당 50,000원가량 했습니다. 2천 쪽짜리 책을 만들려면 무려 200마리가량의 양을 잡아야 필요한 만큼의 양피지를 얻을 수 있었죠. 게다가 무두질을 하지 않는 양피지는 습기에 꽤 민감해서 책으로 만들려면 굵은 실과 튼튼한 가죽 끈으로 꿰매고 표지는 두꺼운 나무판자처럼 무게 있는 재료를 써야 뒤틀리지 않습니다. 책이 뒤틀리는 걸 막으려고 표지를 덮은 상태에서 고정하는 잠금장치를 달아놓기까지 했죠. 이렇듯 가격이 비싸니 양피지는 함부로 쓰지 못했고, 가치 있는 서적이나 성경에 주로 사용했습니다. 이런 책들은 그냥 만드는 게 아니라 필경사가 오랜 시간 정성 들여 쓰고, 화가가 화려한 삽화를 그려 넣었으며, 금박과 비싼 안료로 화려하게 장식해서 제작했기에 가격이 엄청났습니다.
1455년에 양피지로 만든 수제 필사본 성경은 약 60~100 굴덴이었고, 인쇄해서 만든 1286 페이지 구텐베르크 성경은 독피지(vellum) 본은 50 굴덴이었습니다. 당시 일반 노동자의 월 수입이 2 굴덴 정도였으니 2~3년 치 연봉과 맞먹는 셈입니다.
이외에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진흙으로 만드는 점토판, 고대 중국에서는 비단 등을 기록매체로 사용했습니다.
종이의 발명과 발전에 관한 내용은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세요.
[역사] 종이의 역사 - 발명, 전파, 발전, 기계화, 대량 생산
후한(後漢)의 채륜(蔡倫)이 최초의 실용적인 종이인 채후지(蔡侯紙)를 개발한 후로 종이는 많은 발전을 거쳐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종이의 발명과 역사에 대해 알아
2n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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