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진도군 임회면에 있는 남도진성은 고려시대 몽골 침략군에 최후까지 저항했던 삼별초 중 일부가 장렬하게 최후를 마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남도포진성, 남도석성(南挑石城)이라고도 하며 1964년 사적으로 지정되었습니다.
1. 배중손(裵仲孫)과 남도진성
1270년 고려 조정이 몽골에 항복하고 개경으로 환도하자 이를 반대한 삼별초 군은 강화도에서 진도로 남하했습니다. 삼별초 군은 현재의 진도읍 북쪽 용장산성을 근거지로 “오랑”이란 독자적인 연호를 내걸고 독립국임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3년 뒤인 1273년 세 방향으로 침공한 여몽 연합군의 공격으로 용장산성이 함락되었고, 삼별초의 참모장 격인 배중손 장군은 남도진성에서 끝까지 항거하다 전원 전사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삼별초군이 제주도로 후퇴하는데도 유독 배중손 장군만이 남도진성을 끝까지 지킨 것은 배중손 장군의 고향이 진도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남도진성의 성벽은 높낮이에 차이가 있지만 평균 5.3m이며 높은 곳은 6m 정도 됩니다. 성벽의 폭은 2.5~3m로 상당히 넓고 바깥쪽이 안쪽보다 높게 층져서 방어에 유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전체 둘레 610m인 성벽 최상부엔 “눈썹”이라 부르는 돌출부가 성 바깥쪽으로 나와 있어서 기어오르기 힘든 구조입니다.
성마을의 남쪽 앞산은 몽골군이 섬을 접수한 뒤에 군마 목장으로 썼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2. 남도진성의 건립 연대와 역사
남도진성의 건립 연대는 아직 정확하지 않습니다. 성이 있는 남동리 일대는 백제시대 매구리현(買九里縣)으로 진도의 주요 지역 중 하나였습니다. 따라서 현재 성이 있는 자리엔 삼국시대부터 이미 어떤 형태로든 성채가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려 때인 1270년 8월에 삼별초의 배중손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강화도에서 이곳으로 남하하여 성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마을 사람들 사이에 구전됩니다.
여몽 연합군의 일본정벌이 실패한 뒤 1350년경부터 왜구들이 날뛰자 진도 사람들은 섬을 비우고 영암과 해남 등지로 피난을 갔습니다. 진도 주민들이 본토로 피신한 뒤에도 진도에는 수군이 주둔해 왜구 등의 침입에 대비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438년(세종 20년) 정월 남도포(南桃浦)에 만호부(萬戶府)가 처음 생기면서 진도 주민들은 다시 섬으로 돌아왔고, 이때 비로소 남도진성이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 견해대로라면 이때부터 성안 마을이 생겼다는 얘기가 됩니다.
남도진성은 동쪽의 금갑보(金甲堡)와 함께 명양(鳴洋)으로 돌아가는 바닷길의 요새에 위치하며, 남해안에서 서해안으로 북상하는 길목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1555년(명종 10) 5월 서해안으로 북상하던 왜적들에게 분탕질당한 일도 있고, 또 이곳의 만호들이 그들을 격퇴하기도 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왜군의 공격으로 남도진성은 쑥밭이 됩니다. 그 후 방치되었다가 1700년경 다시 왜구가 발호하자 1708년 군대가 배치되고 성도 보수됩니다. 1894년 동학란 때에는 동학군이 성의 무기를 탈취해 간 일도 있었습니다.
1895년의 진지(鎭誌)를 보면 장교 10명과 군사 340명 등 모두 374명이 근무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우수영지(右水營誌)엔 한때 수군 566명이 기거했다고 적혀있어서 상당히 큰 진지였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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